祇园祭的基本知识
기온마츠리는 “기온고료에(祇園御霊会)”라고도 불리며, 이른바 고료(御靈)신앙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마츠리입니다. ‘’고료’’라는 것은 원령(怨靈)이라고도 하며 비명횡사를 하여 이 세상에 미련과 한을 가진 사자의 영혼으로, 이러한 영혼이 사람에게 역병을 퍼뜨린다고 하여 그들의 사나운 영혼을 환대하고 위로함으로 해서 재액을 초래하지 않도록 신의 세계로 보내기 위한 제례가 고료에(御霊会)라 불리는 마츠리입니다.
고료신앙은 헤이안시대에는 우두천왕(牛頭天王) 마츠리와 절충하여 ‘’기온고료에’’로서 정착해 갔습니다. 우두천왕은 인도에서는 기온정사의 수호신이었지만 일본에서는 고료신앙과 맺어져 액신으로 간주되게 되었습니다. 이 신을 모시면 역병이나 재액을 면할 수 있다고 해서 널리 민간에 보급되었습니다. 봄 부터 여름 전의 시기에 고료에가 행해지는 것은 이때가 역병이 가장 유행하기 쉬운 계절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장마로 인한 집중호우때문에 발생하는 하천의 범람과도 관계가 있습니다. 카모 강이나 카츠라 강과 같은 쿄토의 하천은 과가에는 자주 범람했습니다. 하천의 범람은 수해인 동시에 전염병 유행이라는 이차적인 피해를 초래한다는 것은 지금도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시기에 재액이나 역병 초래의 근원이 되는 ‘’고료’’를 제사지내고 쿄토 거리의 평안을 기원한 것 입니다.
그런데 헤이안쿄토의 고료에가 언제 시작되었는 지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고, 명확한 시기는 불명입니다. 아마 헤이안시기 후기인 10세기부터 11세기경에는 우두천왕을 모시는 신불합치의 신전으로서 기온사가 성립되고 거의 같은 시기에 기온고료에가 연중행사로서 정착되었으리라 여겨지고 있습니다.
아야가사호코(綾傘鉾)는 현재 32기의 야마호코(山鉾) 중에서도 매우 드문 「카사호코(傘鉾)」의 형태를 취하는 호코입니다. 카사호코는 츠루기호코(剣鉾)나 카마호코(鎌鉾)등과 같이 오늘날의 야마호코의 형태가 완성되기 이전의 오래된 형태이고, 쿄토시 북구 이마미야신사의 야스라이하나의 하나카사(花傘)로 대표되는 것 처럼, 소위 후류(風流)라고 불리는 구경거리나 예능의 가장 기본적인 형태를 오늘날까지 전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오닌(応仁)의 난 이전인 15세기 전반의 기록에도 아야가사호코가 등장하는 것을 보면 550년이상 전 부터 존재한 오래된 호코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기온마츠리에 등장하는 야마호코의 기층에는 「후류효시모노(風流拍子物)」의 특질이 흐르고 있다고 합니다. 「후류효시모노」라는 것은 신령을 보내고 맞이하고, 특히 역신이나 재앙등이 물러나기를 바라는 「하야스」라는 행위로 부터 나온 군집의 춤이 기본이고, 예능으로서의 특질은 북과 같은 두드리는 종류의 악기(타악기)를 춤꾼이 스스로 두드리며 춤추고, 그리고 이동한다는 점에 있습니다. 「후류효시모노」는 호코(鉾)나 카사(傘), 야마(山)와 가장한 사람이 주체가 되고, 그들은 박자에 장단 맞추어 이동하는 것을 특질로 삼고 있었습니다. 야마호코의 오랜 형태를 오늘에 전하는 카사호코는 실로 장단에 맞춰 이동하는 신령의 동좌(動座) 그 자체이고, 거기에는 「보후리바야시(棒振り囃子)」로 대표되는 화려한 장단을 동반하는 것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무로마치시대에 등장하는 야마호코 중에서 「아야가사호코」나 「시죠가사호코」는 둘 다 하야시모노로 표현되고 있는 것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단언하면 카사호코는 그 자체만으로 존재해도 의미가 없고, 또 「보후리바야시」도 그것 만으로는 의미를 가지지 않는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양자가 모여, 그들이 이동하면서 비로소 의미를 갖는 「후류효시모노」가 되었던 것 입니다.
아야가사호코는 에도 후기 천보(天保) 5년(1834년), 한때 소형 호코로 개조되었습니다만, 원치(元治) 원년(1864년)의 대화재로 대부분 소실되어 버렸습니다. 그 때의 호코 본체는 북관음산의 오래된 재목을 얻어서 만든 것이라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후 명치 12년 (1879년)부터 17년(1884년)까지 원형대로 도보 하야시 형태로 순행했습니다만, 명치17년이후 완전히 단절되어 버렸습니다. 그것이 쇼와 54년(1979년), 선장사(善長寺)거리 사람들의 고생과 노력에 의해서 약 100년만에 부흥을 이룰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 후 아야가사호코는 매년 야마호코 행렬에 참가하게 되어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또 아야가사호코에는 나기나타호코(長刀鉾)와 마찬가지로 남자아이가 치고(稚児)로서 등장하는 것도 큰 특색입니다. 7월17일의 야마호코순행에는 6명의 치고가 도보로 참가하고 있습니다.
아야가사호코와 보후리바야시
아야가사호코 앞에서 펼쳐지는 「보후리바야시」는 에도시대 중기인 18세기 중엽이후 쿄토의 미부(壬生)의 사람들이 봉납하게 된 민속예능으로 오늘날에도 미부의 록사이(六斎) 염불보존회 사람들에 의해 행해지고 있습니다. 그 이전에도 보후리바야시가 행해지고 있었던 것은 몇 군데의 회화자료를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만, 그 당시 보후리바야시는 어떠한 예능집단이 아야가사호코에 봉사했는 지는 알 수 없습니다. 어쨌던 보후리바야시는 다른 야마호코의 하야시에는 없는 카사호코의 특유의 것입니다. 보후리바야시에 사용되는 봉은 길이 5척 정도로 양 끝에 1척정도의 「후사」라는 장식을 단 것입니다. 보후리는 봉을 휘두르는 것으로 액을 제거하는 역할이 주어져 있다고 합니다. 또 북을 치는 쪽은 두 사람이 하나의 「시메타이코」라는 북을, 한사람이 손으로 받들고 다른 한사람이 그것을 두드리고 춤추면서 장단을 맞춥니다.
※翻訳:崔杉昌